독일마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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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가 들어섰을 때 우리나라는 변변한 자원도돈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외국돈을 빌리려 했지만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 등의 비협조로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서독이 1억5000만 마르크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아무조건 없이 빌려준 것은 아니다. 당시 서독 역시 경제개발로 인력이 달려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했다. 특히 간호사와 광부가 많이 필요했는데, 우리 정부는 이들을 서독에 보내주고 그들의 급여를 담보로하여 돈을 빌린 것이다. 이 돈은 장차 한국 경제 부흥의 종자돈이 됐다.

1차 서독 파견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000명이 몰릴 정도로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자리가 부족했다. 이들 가운데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이렇게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독일 경제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난에 찌들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1960년대 젊은이들은 남자는 광부란 이름으로, 여자는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이역만리 타국땅. 독일로 떠났다. 조국에서 못 이룬 꿈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 남아야 했다.

유학과 돈의 꿈을 품고 떠났지만 그들이 말하는 3년 간의 광부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40도가 넘는 지하 000미터-3000미터의 작업은 팬티를 5~6번 짜서 입고, 장화 속에 고인 담의 물을 열 번 이상 쏟아야 비로소 하루해가 지나간다고 한다.


독일로 간 간호사들은 돈을 많이 버는게 최대의 목적 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도 병원 일이 쉽지는 않았다. 40kg을 겨우 넘기는 가녀다란 몸으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을 씻기고,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겹치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여 받은 돈 600마르크 중 자신들은 10마르크만 남겨두고 고향으로 송금하여 돈을 모았다.


60년대에 해외를 간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고 한다. 1진 광부를 데리고 독일에 갔던 그 당시 노동청 작업안정 국장은 광부들은 소풍가는 아이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3년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배추 대신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고, 한국의 노래를 들으며 향수를 달래는 것이 광부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간호사들은 향수병에 걸려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 십명에 달했다고 한다. 잘 적응한 간호사들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뚱뚱한 독일인들을 수십 년 간 간호하느라 허리와 관절에 무리가와 대부분 수술을 받았다. 광부들은 기계로 손가락 한두 개 잘려나간 것은 광부들에겐 예삿일이었고, 함께 지냈던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고 한다.


1964년 12월 차관을 빌리기 위해 우리나라대통령이 서독 함보른 탄광을 방문하였을 때 연설 중에 파독 근로자와 대통령이 함께 눈믈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때 독일 뤼프케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한국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돕겠노라” 라고하면서 손수건을 건내면서 말씀하셨던 뤼프케 대통령의 따뜻한 격려는 가난한 나라에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정말 큰 힘이 되었으며 그 손수건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역사적인 손수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렀다. 독일인 손자 손녀를 둔 60,70대 노인의 이들은 연금으로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남해군 삼동면 물건마을 뒷산에 독일의 마을이 만들어졌다. 물론 자기 취향대로 집을 짓되 독일식으로 집과 정원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멀리서 보면 건물 외양때문에 독일 마을처럼 보인다.


독일마을 터는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300년된 고목나무 숲이 아름다운 남해 방조어부림있다. 거칠고 거센 바닷바름을 막아준다고 하여 방품림이라고도 부르고 파도에 의한 해일이나 염분, 조수 해일을 막아 준다고 하여 방조림이라 부른다. 그리고 숲의 초록빛으로 물고기 떼를 불러들인다 하여 어부림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엔 천연기념물 150호로  지정된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 100여종 1만 그루의 나무숲이 몽돌 백사장을 따라 반달 모양으로 조성되어있다. 본 사람은 그 좋음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남해의 영산인 금산의 한 줄기가 길게 뻗어 가다가 멈춘 곳이기도 하다.


-초음마을 사랑회 다음카페 발췌-